최근에 점자로 만들어진 그림책「나무를 만져 보세요」와 이미경 작가와 권정선 화가가 송암 박두성 선생님의 삶을 그린 책「점자로 세상을 열다」를 사서 읽었다.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박두성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어가노라니 마치 한글 창제를 하기 위해 연구하시던 중 눈병이 난 세종대왕께서 쉼을 얻고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들린 초정리 약수에 얽힌 일화를 책으로 엮은 배유안 작가의「초정리 편지」를 읽는 그런 느낌이었다.

박두성 선생님의 위대한 삶을 만나 보기 전 먼저 송혜승 작가의 그림책을 펼쳐 들었다. 난생 처음 보는 점자책이었다. 표지 제목과 그림이 모두 입체적이어서 손끝으로 만지면 한글 자모음과 그림이 만져졌다. 사과나무 그림이었다. 사계절에 피는 꽃과 나무의 변화하는 모습을 소년이 설명해 주는 그림책으로 왼쪽은 단순하지만 만지면 알 수 있는 그림과 함께 하단엔 점자가 오돌토돌 튀어나 와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민들레와 봉숭아, 코스모스와 노란 해바라기의 키와 소년의 키 높이를 비교하면서 다소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손끝과 손바닥으 로 만져가며 계절의 변화와 꽃들의 생김새를 느껴볼 수 있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 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왼쪽에 실린 점자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막막하게 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책들을 읽고 가까이 하 면서도 정작 점자책 한 권 소장하지 못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더 안타깝고 암담한 건 손끝으로 느낌은 오는데 그게 무슨 글자를 뜻하는지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혼자서는 넘어설 수 없 는 벽 앞에 멈춰 선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점자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가 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기도 하고 방법을 찾아보려 모색했지만 점자를 배운다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만 하지 정작 그것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우리 주위엔 별로 없다는 게 뜻밖이었다. 누구나 언제 어떻게 시력을 잃을지 모르는데 문맹과 컴맹을 넘어 점맹인 채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현주소를 맞닥뜨린 것 같아 속히 개선되어져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우리 마을에는 여든아홉살이 되신 할머니가 계신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으신 분이다. 그러나 녹내장으로 수술을 한 이후 점점 눈앞이 희미해지면서 사물을 선명하게 볼 수 없고 어릿어릿 형체만 보여 여간 불편해하시는 게 아니다. 바깥출입을 하게 되면 몸의 중심을 잡기도 어렵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어느 날 댁에 들렀더니 안방에서 화장실 가는 거실 바닥 에 두꺼운 밧줄이 놓여 있고 군데군데 테이프 가 붙여져 있었다. 화장 실을 찾느라 두 팔을 허 우적거리며 이 방 저 방 찾다 넘어지거나 실례를 하는 경우가 생겨 그 줄을 따라가기만 하면 볼 일을 볼 수 있도록 자녀 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 라 한다. 요양원 생활을 원치 않으셔서 요즘은 24시간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고 계신데 두 눈이 번쩍 떠졌으면 원이 없겠다고 늘 하소 연하신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시력을 잃을지 모른 다. 누구나 시각장애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이 열려 있다. 물론 나 역시. 만일 그리 될 경 우 일상생활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내게는 한 가지 근심거리가 있다.‘만일 이 다음에 내가 노안이 심해지거나 혹은 눈 과 관련된 질병이 찾아오고, 아니면 사고로 시력을 잃는다면 그토록 좋아하는 독서와 글 쓰기는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 시라도 젊고 건강할 때 점자를 배워두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점자를 마음만 먹으면 그다 지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모두 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 점자 훈맹정음 을 펴낸 박두성 선생님 덕분인데 이것은 훈 민정음과 같이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 으며, 점자 수 또한 63개로 적어서 배우기 쉽고 헷갈리지 않게 구성돼 있다. 자음이나 모음을 나타내는 6점식 점자로 여섯 개의 점 가운데 어떤 위치에 있는 점이 볼록 튀어 나 왔느냐로 글자를 구분한다. 시각장애인들은 손끝으로 튀어나온 점을 만져서 글자를 읽는 데 자음과 모음, 문장부호와 숫자, 관용어 등 기본 글자만 익히면 누구나 쉽게 배워 쓸 수 있다 하고 남북한이 공통으로 이 점자를 사 용한다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올해는 1446년 한글이 반포된 지 574주 년,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이 반포된 지 는 94주년이 되는 해이다. 2020년은 박두 성 선생님 탄생 132주기이기도 하다. 이 뜻 깊은 해에 서양의 점자나 일본의 점자를 따 라 만들지 않고 우리 한글의 원리를 그대로 따른‘눈먼 사람들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라는 뜻을 지닌 훈맹정음을 만들어 시각장 애인들의 빛이 되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알 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 지 모른다.

점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더러 보기도 하 고 슬쩍 만져보기도 했지만 읽을 줄도, 배워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2020년 574주년 한글날을 맞이해 송암 박두 성 선생님의 삶을 재조명하는 일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강화도 교동 섬마을 소년이었던 그가 스물 여섯 살에 선생이 되어‘조선 총독부 제생원 맹아부’에서 만난 귀 먹고 눈 먼 아이들은 그 의 전 생애를 바꿔놓았다. 그는 밤낮없이 남의 나라 말과 글이 아니 우리의 말과 글을 담 을 수 있는 조선어 점자를 궁리했고, 그것이 사명감이 되어 점자 연구와 책을 만들어 보 급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글을 배워야 새 로운 세계에 눈뜰 수 있고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직업의식과 예의범절 은 물론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 한 줄기 빛 으로 이 땅에 보내주신 하늘의 선물이었다. 한 번도 나이를 세어본 적 없이 나이를 잊고 열심히 살았던 송암 박두성 선생님. 나를 위 한 삶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나를 드리는 삶 을 살았던 그의 정신을 가슴속에 새겨 본다.

비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점자를 배우고 익혀 그것을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 만들어져 그것을 배울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오는 건 왜일까. 그것 이 막연한 바람이 아닌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 될 것을 믿는다.

글 | 김난주(시인, 시낭송가, 대한민국 명강사 제2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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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문화원에서 발간 된 스산의 숨결 2020. 가을 호에서 일부 발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