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 발췌

(1) 경험을 담은 글에 비추어 보기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참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되지만, 인류 전체의 경험에 비하면 그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읽기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책은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과 다른 사회의 사람들이 해 온 다양한 생각과 경험들을 담고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색다른 경험이 우리 자신의 간접 경험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와 다를 바 없는 경험에서 다른 사람이 느낀 독특한 생각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사회에 속한 사람의 경험과 생각을 읽고,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돌이켜 보며 성찰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경험과 생각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미 있는 경험을 담은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이처럼 글의 내용을 파악하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글에 담긴 경험과 생각을 통해 배우고 공감하며 자신을 돌아보아 삶을 변화시키는 것까지가 읽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읽을 때 거기에 자신의 체험을 비추어 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글을 읽는 일이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비추어 봄'을 통해 우리가 늘 글쓴이의 경험과 생각을 비판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글에 담긴 삶과 생각에 공감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가치 있는 삶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에도 읽은 바를 버리지 말고, 더 근본적인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손끝으로 여는 세상
1) 제생원 맹아부
 서울 서대문 밖 천영동 98번지. 거기에는 '조선 총독부 제생원 맹아부' 라고 쓰인 큼직한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뜰 가운데 돌로 쌓은 축대 위에는 나무로 지은 학교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앞 돌로 쌓은 축대 위에는 나무로 지은 학교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앞 돌계단에는 모처럼 따뜻한 햇볕을 쬐러 밖으로 나온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도대체 앞을 보지 못하는 저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눈을 뜨고도 살기 힘든 세상을 저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제생원 아이들을 보고 온 날, 박두성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떠올리느라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2) 점자를 만나다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의 표정은 생기가 없었습니다. 박두성을 아이들이 재미있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일본어 잠자판을 가져왔습니다.
 "자,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너희 엄지손가락을 집게손가락 맨 첫 마디에 놓고 그곳을 1점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그 아래 마디는 2점, 맨 아래 끝 마디는 3점이다."
 그러고는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아 세 점의 자리를 하나하나 알려 주고, 이런 방법으로 4점, 5점, 6점의 자리도 가르쳤습니다.
 눈으로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게는 여섯 점의 자리를 하나하나 손가락 마디를 짚어 가며 알려 줘야 했어요. 이 방법으로 학생들이 점자를 쉽게 깨치자 박두성은 몹시 기뻤습니다.
 박두성은 아이들에게 종이와 점자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지금 너희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점자판이란다. 거기 난 구멍에 방금 배운 여섯 점 자리가 들어 있단다. 이 송곳 모양의 뾰족한 점필(점자판에 점자를 찍을 수 있게 끝을 뾰족하게 만든 연필 모양의 필기구)로 점을 누르면 종이 뒷면에 오톨도톨한 좁쌀 모양의 점이 튀어나오고, 찍은 종이를 뒤집으면 점자를 읽을 수 있지."
 점을 찍을 때마다 기분 좋게 나는 '사빡, 사빡' 소리에 아이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3) 우리말 점자를 만들자
 "이 망할 메꾸라(눈 먼 사람을 낮춰 부르는 일본 말)야, 눈이 멀었다고 손까지 비뚤어졌느냐?"
 일본에서 들여온 점자 인쇄기에 정신없이 매달려 있던 박두성은 교무실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메꾸라'라는 말을 쓰다니‥‥.' 화가 치밀어 오른 박두성은 한달음에 교무실로 뛰어갔습니다. 맹아부 학생 하나가 일본인 교사에게 사정없이 얻어맞고 있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교무실에 심부름을 온 학생이 일본인 교사의 책상을 더듬다가 그만 잘못해서 잉크병을 엎질러 버리고 만 것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박두성은 더 참을 수가 없었어요. 박두성은 일본인 교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당신 두 눈이 건강하다고 앞으로 눈을 잃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시각장애인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라면 정신과 마음부터 건강해야 합니다. 학생들 눈을 밝히려 하기 전에 당신 마음의 눈부터 밝혀야겠소."
 아무리 마음이 격해도 흥분하지 않고 결국 할 말을 다 하고야 마는 박두성을 보고, 일본인 교사는 새파랗게 질린 채 부르르 떨었습니다.
 일본인에게 이런 차별과 모욕을 당할 때마다 박두성의 가슴속에는 나라 없는 백성의 울분이 쌓였습니다. 가장 답답한 것은 우리나라 말로 된 점자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평양에서 제생원으로 유학 온 학생들 가운데는 우리말 점자를 쓰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선교사인 로제타 홀 여사가 미국의 뉴욕점자를 가지고 한글 점자를 만들어, 자신이 세운 '평양 여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말과 맞지 않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4) 우리말 점자를 만들기 위한 노력
 1920년 새해 아침.
 박두성의 머릿속은 온통 한글 점자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잘못 만들어진 점자에 한번 길들면 시각장애인의 손끝 감각을 다시 고치기 어려울 거야. 제대로 된 한들 점자를 연구해야만 해."
고요히 잠든 제생원 기숙사를 돌다 박두성은 차가운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눈에 띄게 빛나는 새벽별 하나가 머리 위에서 푸르게 빛났습니다.
 그해부터 박두성은 전태환, 노학우, 왕석보 세병의 제자와 함께 한글 점자 연구에 빠져들었습니다.
 제자들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임시로 만든 한글 점자가 나왔습니다. 박두성은 자신이 만든 점자가 과연 학생들에게 맞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깜깜한 밤, 촛불도 끄고 눈을 감은 채 손끝으로 점자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임시로 만든 한글 점자에 확신이 생기자, 박두성은 다시 세 학생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내가 만든 3.2점식 점자란다. 자음은 세 점으로 , 모음은 두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너희가 이걸 읽어 보고 어떤지 내게 말해 주렴."
 점자로 고쳐진 종이를 받아 든 세 학생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읽어 보는 제대로 된 한글 점자였기 때문이지요.

5) 더욱 나은 우리말 점자를 만들기 위해
 "여보, 무얼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아내가 박두성을 보고 물었습니다. 벌써 몇십 분째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는 남편을 보니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겠어. 받침 글자를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어."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박두성은 오른쪽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쉴새 없이 붙었다 떼었다 하고 있었습니다.
 점자를 연구하느라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면 박두성은 다른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받침으로 쓰는 자음을 첫소리 자음과 똑같이 쓰니,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어느 게 받침인지 도무지 구분을 못 하는군. 시간이 걸리더라도 받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이렇게 3.2점식 점자의 가장 큰 문제는 받침으로 쓰는 자음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박두성은 마침 맹아부 졸업생 가운데 일본으로 유학 간 노학우에게 세계 시각장애인의 아버지인 루이 브라유가 만든 점자 배열표를 연구하게 했어요. 물론 브라유가 만든 점자는 알파벳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어서 이를 한글점자에 모두 적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오랜 연구 끝에 박두성은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박두성은 가로로 두 점씩, 세로로 세 줄, 모두 여섯 점을 가지고 서로 겹치지 않도록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수학으로 계산했어요. 그랬더니 한 점을 쓴 경우에서 여섯 점 모두를 다 쓴 경우까지, 모두 예순 세 가지 점자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점자를 우리 한글 원리에 맞게 잘 배치하는 일이었어요.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점자 연구에 몰두하던 박두성은 그만 심한 눈병에 걸리고 말랐습니다. 손끝으로 만져야 겨우 알 수 있는 깨알 같은 점자를 들여다보며 읽고 다시 점자로 옮기느라 자신의 눈을 너무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흐릿하던 박두성의 눈은 겨우 낫기는 했지만, 눈동자가 그만 회색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6) 마침내 빛을 본 '훈맹정음'과 '육화사'
 박두성은 눈병 때문에 멈추었던 한글 점자 연구를 더시 시작했습니다.
 손끝으로 점자를 만졌을 때, 점이 적을수록 읽기 쉬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박두성은 주로 두 점으로 첫소리 자음과 받침 글자를 만들고, 모음은 모두 세 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첫소리 'ㅇ'은 빼고,문장에서 많이 쓰이는 글자(가, 을, 은, 의, 애, 예, 와, 워)들은 따로 데어 간단한 약자를 만들었습니다.
 1926년 8월, 마침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인 '훈맹정음(訓盲正音)'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눈먼 사람들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지요. 처음 3.2 점자를 연구한 지 6년여 만의 일이었습니다. 1926년은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습니다.
 박두성은 자신이 창안한 한글 점자가 실제로 시각장애인들에게 얼마나 편리한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글 점자의 실용성을 연구하려고 '조선어 점자 연구회'를 만들었고, 곧이어 '육화사'라는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육화'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결정이 육각형인 것에서 따온 것으로, 점자가 여섯 점인 것과도 관련이 있었어요. 하얀 종이 위에 촘촘하게 잘써진 점자는 그 모습이 마치 눈꽃처럼 보이기도 했지요.

7) 늘 푸른 소나무가 되다
 1963년 8월 25일, 박두성의 집에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8년째 자리에 누워 힘겹게 병과 싸우던 박두성은 의식이 가물거리는데도 쉴 새 없이 오른손 엄지 끝으로 집게손가락 마디를 하나씩 짚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평생 점자를 연구하시던 그 일이 생명이 끊어지려는 마지막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네요."
 박두성의 바로 곁에서 임종을 지키던 딸 정희가 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윽고 멀리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끼던 제생원 맹아부 시절의 제자가 박두성의 손을 잡으며,
 "선생님!"
 하고 부르자, 감은 박두성의 두 눈가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일흔여섯 해, 암자의 소나무처럼 푸르게 살아온 박두성은 이렇게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